
우장춘 기념관, 동래별장, 이주홍 문학관
부산문화관광에서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관광지!
- 우장춘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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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은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씨앗 연구에 헌신해 우리나라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우장춘 기념관 앞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물’이라는 뜻에서 자유천(慈乳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우물이다. 자유천 앞에는 우 박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주변 친지들이 모아준 조의금으로 만든 우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정작 우 박사는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가족을 일본에 두고 혼자 귀국한 우 박사가 모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한
정부가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자유천은 우 박사가 실험을 하는데 필요한 물 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에게 식수도 공급했다.
매일 아침 지유천 주변을 청소하는 것으로 우 박사의 일과가 시작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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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1층에는 우 박사의 일생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우 박사가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과 함께 명성황후를
시해한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일본으로 달아난 우범선이 현지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우장춘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하지만 우범선은 피 끓는 애국 청년의 칼에 숨지고 우장춘은 다섯 살 때부터 일본인 어머니의 손에 자란다. 이후 도쿄대학 농학부를 졸업한 우장춘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 살다가 8·15 광복 후 아내와 자식을 일본에 둔 채 혼자 귀국해 육종연구에 몰두하다 조국에서 숨을 거둔 사연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유리로 만든 진열대에는 우 박사가 사용했던 현미경과 도장, 연구노트를 비롯한 유품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친필로 썼다는 연구 논문에는 일본 글씨가 잔뜩 적혀 있다. 우 박사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우 박사는 “한국말과 글을 배우는 시간까지 합쳐서 모든 힘을 씨앗 연구에 쏟아 붓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념관 2층에는 우 박사가 우리나라 육종 산업에 남긴 업적들이 소개되어 있다. 무와 배추를 합성한 ‘무추’, 토마토와 감자를 합성한 ‘토감’ 등 우 박사가 이룬 성과물들의 모형 171점이 전시되어 있다.
- 상세정보
- 주소안내 : 부산시 동래구 우장춘로 62번 길 7
- 대중교통 : 도시철도 3호선 미남역 12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 거리
- 전화번호 : 051)550-4478
- 동래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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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별장은 학이 머무르며 다친 다리를 치유했다는 동래온천 뒤편에 있다. 일제강점기 부산을 드나들던 일본 귀족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별장은 1880년, 일본 오사카에서 건너온 상인 하자마 후시타로가 개인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래별장이 건립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건축 대장 등 남아 있는 서류들로 미뤄 최소한 1912년 이전에 지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동래별장의 첫 번째 주인인 하자마 후시타로는 일본 와카야마 출신으로 오사카에 있던 이오이 상점의 점원으로 출발해 거부로 성장한 사람이다. 후시타로가 부산으로 건너올 1880년 당시 나이는 21살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국 생활을 시작한 하자마는 마흔 살이 되던 1899년에 수산업과 창고업, 곡물업에 진출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산 인근 지역 논과 밭 등을 무차별하게 사들인 하자마는 부산의 3대 거부로 성장한 후 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 부산토지(주)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자마가 유명세를 탄 것은 1924년 9월 부산에 온 일본 천황가 사람들이 동래별장에 머문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당시 하자마는 일본 천황 일족을 영접하기 위해 거금 10만 원의 자금을 들여서 정원을 새로 꾸미고, 연못까지 확장했다고 한다.
8·15 광복 이후 동래 별장은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 때에는 부통령 관저로 징발됐다. 전쟁 후엔 개인 소유로 되돌려졌다가 1965년 3월부터 고급요정으로 변신했다. 이후 열 차례에 걸쳐 휴업과 폐업을 거듭하다가 2000년 10월부터 대중음식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동래별장은 금정산에서 자린 나무들과 암석들로 꾸민 정원과 일본식 목조 건물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된 덕분에 영화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상세정보
- 주소안내 : 부산 동래구 금강로 3번 길 12
- 대중교통 : 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5분 거리
- 전화번호 : 051)552-0157
- 이주홍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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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홍 문학관은 8·15 광복 이후 부산에 정착해 지역 문단을 이끌었던 향파 이주홍 선생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향파 선생은 초기 사회적 이념을 담은 카프 계열 작가로 활동하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자 동화와 동시 수필 등을 집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지역 문단의
선구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이주홍 문학관은 요산 문학관, 김성종 추리문학관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문학관으로 꼽히는 곳이다. -
본래 이주홍 문학관은 향파 선생이 1971년부터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온천 1동 177~18번지 (현재 벽산 아스타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그 곳이 도시 개발 지역에 포함되는 바람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주홍 문학관에서는 매년 향파 선생을 기념하는 백일장과 문학축전이 열린다.
1층에는 강당과 세미나실, 시민도서관 등이 있다. 2층에는 향파 선생이 소장했던 잡지와 단행본 6천 점을 포함한 각종 그림과 사진 육필 원고와 등 1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향파 선생이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만년필과 수첩이 눈길을 끈다.
1930년대 향파 선생이 직접 제호를 쓰고 작품을 발표했던 ‘신소년’(1934년 폐간)을 모아둔 잡지철과 1936년 향파선생이 창간했던 카프 계열 순수문예지 ‘풍림’ 등을 모아둔 코너도
있다. 카프 계열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했던 ‘별나라’(1935년 폐간)를 모아둔 잡지철도 희귀본으로 꼽힌다. 이주홍 문학관 바로 옆에는 향파 선생의 미망인을 비롯한 유족들이 사는
주택이 있다.
- 상세정보
- 주소안내 : 부산 동래구 금강로 61번 길 20-12
- 대중교통 : 도시철도 1호선 명륜역 3번 출구에서 5분 거리
- 전화번호 : 051)55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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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동래구3
지하철
명륜역 5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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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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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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