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가장 뜨거운 섬 가덕도
부산문화관광에서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관광지!
가덕도는 동남권 신공항의 유력 후보지가 되며
가장 뜨거운 섬이 되었다.
아니 가덕도는 섬이면서, 동시에 섬이 아니라고? 이게 무슨 말일까. 11개의 무인도가 딸려 있는
이 섬은 부산시에 속한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인구 14만 명이 사는 영도보다 1.6배나 크다.
대부분 지역이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산지로 돼 있고, 섬 둘레 36㎞가 대개 깎아지른 암벽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당신의 나이가 중년 이상이라면 진해 용원에서 배를 타고 선창에 내려 연대봉을 오른 뒤 대항이나
천성 선착장에서 회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돌아갈 배를 기다리던 추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당시의 가덕도는 부산시민들에게 남해나 거제만큼이나 외떨어진 섬이었다.
주유천하로 이름난 부산의 최원준 시인은 “젊은 시절, 봄볕에 취해 나의 여인을 두고 무작정 가덕도로 들어간 날,
마지막 배를 놓치고 가덕에서 일박을 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 곁에 없는’ 그 길고 긴 하룻밤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단절된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2010년 가덕대교와 거가대교가 연이어 개통되면서 가덕도는 일순간 바뀌었다. 진해와 연결되는 부산항 신항이 들어서면서 해안선도 바뀌고, 사실상 육지로 편입됐다.
내륙과 섬을 잇던 도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시내버스가 천성까지 들어간다. 가덕도는 예전부터 낚시꾼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주말이면 가덕도는 낚시꾼과
등산객으로 넘쳐난다. 특히 대항선착장 앞은 차를 대어 놓기조차 힘들 정도로 북적이는 곳이 됐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됐지만, 대개 가덕도의 가치를 잘 모른다.
뜨거운 섬 가덕도, 한번 알아보자!
- 더덕이 많아서 가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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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는 왜 가덕도일까. 향토사학자 주경업 선생은 “더덕이 많이 나와서 가덕이라고 한다”라며 들은 이야기를 일러준 적이 있다.
날씨 좋은 가을날 도보로 걸어볼 작정으로 가덕도로 향했다. 대항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해 가덕도 대항마을-외양포 마을-막사-우물-장교사저-적산가옥-포진지-가덕도 대항마을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 소요시간은 4시간을 잡았다.
미리 공부한 바에 따르면 가덕도에는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유적·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2011년 2월엔 가덕도 성북동에서 6천~8천여 년 전 신석기시대 전기로 추정되는 인골 수십
구와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가덕도의 특징은 해양과 전쟁의 흔적이 많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삼포개항 이후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방어시설로 만들어진 천성진성,
가덕진성은 부산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천가초등학교 담벼락은 아직도 가덕진성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이 학교 입구에서는 대원군의 척화비도 만나 볼 수 있다. 궁금하다.
혹시 대원군이 가덕도에 국제공항이 들어서는 것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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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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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의 대항마을은 부산의 최남단에 위치한 ‘부산의 마지막 마을’이다. 대항마을하면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매년 3~5월에 볼 수 있는 ‘육수장망'이라고 불리는 가덕도 전통 어로법인 재래식 숭어잡이다.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 고기잡이는 백수십 년 전부터 전해지고 있다.
“조지라!” 어로장인 망쟁이의 신호에 그물을 잡아당기는 어부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여섯 척의 배가 장막을 치듯 바닷속에 그물을 깔아놓고 기다리면, 산에서 고기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어로장이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일제히 그물을 끌어올려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숭어 떼가 그물 안쪽 끝에서 돌아 나오는 시간이 14초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종일 기다려 허탕을 치는 때도 있지만, 언제 숭어 떼가 올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물을 끌어올릴 타이밍은 산 중턱의 망루에서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물색을 살피는 망쟁이의 신호에 따른다. 봄이 되면 눈이 어두워진다는 숭어가 연안 가까이 오면
망쟁이는 귀신같이 그걸 눈치챈다. 망쟁이의 신호가 메가폰을 통해 바다에 전해지면 대여섯 척의 어선은 일제히 그물로 숭어 떼를 둘러싼 뒤 건져 올린다. 설명을 듣고 바다를 보니
숭어 잡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
- 외양포의 포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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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선창에서 40~50분 거리인 외양포에는 100여 년 전 일본군 제4사단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했다. 마을 뒤 언덕배기에는 포진지의 흔적과 그 시절 일본군 막사 건물들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외양포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정지되어 있는 마을로 보인다.
1904년 일본군은 외양포 주민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명령한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 러시아 발트함대와의 격전을 대비한 포대 사령부를 건설, 주둔시키기 위해서였다.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주민이 고향을 버릴 수 없어 떠나기를 거부하자, 그들의 집과 세간을 불태우고 총과 칼로 위협을 가하는 등 물리적인 방법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대륙 침략의 군사요충지인 외양포에 포진지 요새가 구축되고, 군 막사와 무기창고, 우물과 수리시설 등이 완료되면서 1905년 외양포는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주둔지가 된다.
고사포 진지를 만들기 위해 수백 명의 한국인 노역자를 강제동원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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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령부의 포진지는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포진지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는 내용의 요새 사령부 건립비가 서 있다.
오른쪽으로 포 2대씩을 설치할 수 있는 발사대 터 3곳. 탄약고 2동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병사 내무반 자리가 2개 남아 있다.
일본군은 이렇게 완벽한 포진지를 구축해 진해만으로 들어서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제히 포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을 설명하는 간판조차
없어 아쉽다. 외양포 매항마을 일본군 포대진지를 둘러본 많은 시민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혹자는 "봄~가을엔 이곳에서 멋진 야외 음악공연,
오페라 공연을 해도 손색이 없겠다"는 말도 한다.
- 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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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포에는 현재 20채가량의 집에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그 시절 요새 사령부 관련 건물. 헌병대 막사, 무기창고, 장교
사택, 사병 내무반을 지금껏 수리해 사용하고 있다. 해방 후 인근 마을 무주택자들이 군에서 장기 불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외양포 방파제 앞 매점 건물은 그 당시 헌병대 막사 자리이다. 부대 내 치안을 담당했던 곳이라 건물 지하에는 감옥을 갖춰놓았다. 고구마, 호박 등 수확한 농산물의 저장창고로 사용됐단다.
매점 바로 앞 큰 기와 건물은 일반적으로는 당시 무기창고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알려진다. 하지만 군대의 내무반이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금은 두 가구가 가정집으로 나눠 쓰고 있다. 목조 벽 외부에 함석을 덧대고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창문 위 눈썹지붕도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이다. 당시 건물의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가덕도에서는 한 건물에 양분된 색깔의 지붕도 곧잘 만나게 된다. -
- 적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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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간쯤에 있는 사병 내무반 건물. 언뜻 지붕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 한 건물에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는데, 가구마다 지붕 색깔이 다르다.
건물은 하나지만 지붕의 색은 가구별 경계에 따라 각기 따로 색칠해 놓았다. 여유가 생길 때 조금씩 수선해서 그렇게 된 것이란다. 설명을 듣고 나니 짠한 기분도 든다.
마을 전체가 '일제강점기'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 침략의 역사가 속속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역사는 흔적으로 남겨져 보존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런 시각으로 봤을 때 외양포, 이곳은 우리 뼈아픈 식민지시대 역사의 통절한 반성과 교훈의 장소이다. 다양한 보존방법이 논의되었으면 좋겠다.
- 가덕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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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가덕도의 맨 끝에 있는 가덕도 등대 구경은 하지 못했다. 가덕도 등대는 군 부대를 통과해야 하기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 건립됐다. 대한제국 때 건립된 41개 유인 등대 중의 하나다. 근대 서구 건축기법이 사용된 건물로 건물 중앙에 8각형의 등탑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현재 가덕도 등대는 신축된 등대와 문화유산인 구 등대 건물, 숙소, 등대 100주년 기념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신축 등대의 등탑 높이는 40.5m로 포항 호미곶 등대(41m) 다음으로 높다.
등대에서 보내는 빛과 소리는 각각 48㎞(광파), 5㎞(음파)로 그 빛이 일본 대마도에까지 이른다.
부산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구 등대건물은 근대 서구 건축의 양식,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사용된 건물이다. 당시 건립된 등대 원형 대부분이 크게 훼손된 데 비해 가덕도
등대는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돋보이는 건물로 평가된다.
등대 100주년 기념관에는 등대 역사관, 가덕 민속 생활 전시관, 학습관이 들어서 있다. 가덕도 등대의 역사뿐 아니라 가덕도의 민속과 문화,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되고 있다.
해양문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 정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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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로 가덕도 앞 눌차도 북동쪽의 정거 마을(강서구 눌차동)로 향했다.
벽화 마을로 이름이 난 곳이라 기왕 가덕도까지 온 김에 들르기로 한 것이다.
지명만 봐도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간다. 정거마을 동쪽의 ‘터질목’은 파도가 심해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배가 잘 터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고기잡이배들은 바람이
심할 때는 이곳에 닻을 놓고 파도가 잠잠해 질 때까지 피했다. 닻을 걸어 놓는 곳이라 하여 ‘닻걸이’라고 불렀다. 한자 지명으로 ‘닻 정(碇)’에 걸이를 거리(巨理)로 표기하여
‘정거리(碇巨理)’라 했다.
정거마을 앞 북동쪽에는 100년 전에 생성된 천혜의 생태 보고 진우도가 있다. 동편으로 장자도, 신자도 등 낙동강 하구 퇴적작용으로 새로이 만들어지고 커지는 섬들을 볼 수 있다.
정거마을 카페에서 진우도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줄을 잡고 건너는 뗏목배가 진우도까지 사람들을 실어나르면 멋진 관광상품이 되지 않을까.
요즘엔 벽화마을이 천지다. 하지만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그린 정거마을의 벽화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생태 벽화마을’이라는 타이틀이 제격이다.
놓치면 후회하니 꼭 들려보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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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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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필진 상세보기
필진소개
-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맛집, 여행
취재후기
오랫동안 맛집과 여행 분야를 담당했다. 그 덕분에 '부산을 맛보다'와 '규슈 백년의 맛'을 출간하기도 했다.
예전에 어른들이 "부산이 참 좋다"라고 이야기하면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세상을 꽤 돌아다녀 보니 이제
그 분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된다. 부산에는 볼 것도 먹을 것도 정말 많다. 부산만한 곳이 세상에 드물다.
젊은 사람들의 제주 이주가 늘고 있다. 제주로 가볼까, 잠깐 고민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말았다.
제주만한 풍광과 서울만한 도시가 어울린 곳이 부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천 문화 마을같은 숨은 보석이 너무 유명한 관광지가 되며 변질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안타깝다. 샤람들이 많이 찾으면서도, 원래의 모습이 유지될 방법은 없는 걸까.
취재관광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