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디버스를 아시나요
부산문화관광에서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관광지!
부산 산복도로 투어
'만디버스'를 아시나요?
산만디? 부산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른다. 산만디는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의미한다.
산복도로? 국어사전에 산복도로가 나오지는 않지만 부산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듣는 말이다.
산복도로는 부산의 오래된 풍경을 굽이굽이 껴안아 돈다. 부산의 숨겨진 민낯, 아픈 속살 같은
산복도로를 찾는 발걸음이 늘고 있다. 하지만 차 한 대도 잠시 쉬어가기 힘든 좁고 가파른 지형이
산만디이고 산복도로다. 오죽했으면 지붕에 차를 얹고 사는 ‘옥상주차장’이 탄생했을까.
이 광경은 부산에서만 볼 수 있다.
산복도로를 오가는 미니 시티투어버스인 '만디버스'가 2015년부터 시범운행에 들어갔다.
만디버스를 타고 부산의 명물 산복도로를 달려보자. 잠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먼저 부산에 왜 이렇게 산복도로가 많이 생기게 되었는지 공부부터 하고 가자.
만디버스 타고 산만디 가봤나?
- 산복도로가 뭐꼬?
- 산복도로(山腹道路)는 사전적으로 산의 중턱(腹)을 지나는 도로를 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경사지까지 개발이 이루어지며 가장 위쪽에 자리한 도로를 의미한다. 부산에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다. 개항기를 거치며 부두 노동자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사람들은 경사진 산지를 따라 올라가며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정착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며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은 기존 정착지에서 더 위쪽 산지까지 영세한 판자촌 마을을 형성했다. 이들은 부두 노동자나 도심부 시장의 일꾼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인해 몰려든 가난한 이농 인구가 산동네의 정착민으로 자리 잡는다. 평지가 좁은 부산 도심부로 유입된 대규모의 외지인들에 의해 도시 난개발의 역사를 보여 주는 공간이 부산의 산동네이다. 이 산동네를 연결하는 도로가 산복도로다. 산동네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산복도로는 부산의 도시 공간을 산복도로 위와 아래로 수직적 형태로 구획한다. 산 위 마을까지 다니는 노선버스가 생겨나고 산복도로는 산동네 곳곳을 가로지르며 산 위 주거지와 산 아래 생산 활동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마을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사람들은 가파른 길을 달리는 대형 버스에 몸을 싣고 산 아래 일터로 향했다가 다시 산 위의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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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디버스가 달린다!
- 산복도로를 오가는 미니 시티투어버스인 '만디버스'가 2015년 시범운행에 들어갔다. 시범운행 기간 만디버스는 목·금·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운행 코스는 부산역 시계탑 앞에서 출발해 까꼬막-이바구공작소-금수현의 음악살롱-닥밭골 행복마을-동아대 석당박물관-감천문화마을-비석문화마을-보수동 책방골목을 돌아온다. 거점시설 8곳 중 2곳(자유선택)의 체험활동비 1만 원을 내면 된다. 최대 탑승 인원은 18명이다. 부산시는 올 연말까지 시범 운행을 한 후 민간사업자 공모를 거쳐 2016년부터 만디버스 운행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부산역에서 만디버스 순환형 코스에 올랐다. 참고로 테마형코스는 마을해설사가 동행해 역사, 문화 등에 대해 현장에서 설명한다.
- 첫 번째 정류장 ‘까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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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꼬막’은 경상도 사투리로 ‘산비탈’이다. 6·25전쟁 피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판잣집을 형상화한 게스트하우스 ‘까꼬막’ 근처가 첫 번째 정류장이다.
‘까꼬막’에서는 4인 기준 5만 원이면 하루를 묵어 갈 수 있다. 부산항의 야경을 보며 하룻밤을 묵어가기에 좋다. 까꼬막 카페에서는 부산항과 산복도로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커피, 다과 등 마을 기업 상품도 판매한다.
까꼬막에서 ‘유치환의 우체통’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이다.
유치환의 우체통은 부산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 선생을 그리는 공간이다.
여기서 1년 뒤에 배달되는 우체통 엽서를 보내보자. -
- 두 번째 정류장 ‘이바구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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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구’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이다. 이바구공작소는 해방~6·25전쟁~월남 파병에 이르는 근대의 역사와 산복도로 이야기를 수집해 담아낸 생활자료관이다.
여기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장기려 더나눔’이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며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동구 지역에 설립하고, 평생 가난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화 끈을 다시 매야 할 시간이 왔다. 산복도로의 백미 168계단이 거만하게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복도로 주민의 고단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부산항에서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도 하다. -
- 세 번째 정류장 ‘금수현의 음악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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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그네’ 등 가곡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금난새 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금수현 선생은 1919년 7월 22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중구 영주동 옛 자택에는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음악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단다. 부산 중구청은 연일 연주회가 열려 밤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선생의 음악살롱에서 영감을 받아 금수현의 ’음악살롱‘을
건립했다. 여기서 390m 거리에는 ‘밀다원 시대’가 있다.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김동리, 황순원 등 문인들이 주로 찾던 찻집이 밀다원이다.
김동리 소설 ‘밀다원 시대’의 배경이자 작곡가 윤용하가 시인 박화목과 만나 가곡 보리밭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현재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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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번째 정류장 ‘감천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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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최근 부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인 감천문화마을 정류장에서 내렸다. 감천 문화마을은 태극도 도인들이 이주하며 만들어졌다.
이들은 비록 경사면이지만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도록 질서 정연하게 집을 지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산토리니’나 ‘마추픽추’, 또는 가로로 길다고 해서 ‘기차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저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방역하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방역만 왔다 하면 신이 나서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추억을 따라 달려갔지만 방역하는 분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골목에서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는 할머니를 만났다. 재첩국 수레를 끌고 좁고 경사 급한 골목을 느긋하게 다닌다.
얼마나 경사가 심한지 차들이 하늘로 곧장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집들이 작고 또 다닥다닥 붙어 누구는 세트장 같다고 한다. 마을에 유일하게 우뚝 솟은 한 아파트가 나머지 집들과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동네 부르주아들은 다 저기에 살고, 주민들 소원이 아파트에 살아 보는 것이란다. 집집마다 화분이 참 많다. 지나가는 관광객이 주민에게 받은 것은
정(情)이 자라는 꽃씨였다.
건축가들이 보는 감천 문화마을은 경이롭고 미학적이다. 한밤중에 내려다 보는 감천 문화마을은 LED등 덕분인지 따뜻하다. 힘든 하루 일정을 감천 문화마을에서 마감했다. 우리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우인'(友人)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호텔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 집처럼 깔끔하다. 다음 날 골목 산책에 나서 빛의 집, 어둠의 집, 평화의 집, 하늘마루를 만났다. 미로 탐험이라도 하듯이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숨겨진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감천 문화마을의 역사는 태극도 본부회관의 역사자료전을 보면 이해가 된다. -
- 일곱 번째 정류장 ‘비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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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문화마을은 감천문화마을과 이웃해 있다. 감천문화마을은 전국적인 명소가 됐는데 아직 비석문화마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숨은 보물 같은 비석마을이 더 마음에 든다.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있던 지역이었다.
6·25전쟁 중 피란민들이 공동묘지 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들은 공동묘지의 상석과 비석을 쌓아 골목길 계단을 만들고 집의 기둥과 주춧돌을 만들어
사용했다. 집 밖으로 나오면 마당이 아니라, 바로 골목으로 이어져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이다.
비석문화마을은 근현대사의 아픔이 녹아 있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현재 비석문화마을에는 2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1인 가구가 많고 특히 60대 이상 노인들 비율이 높다.
마을 주민 진순남 씨는 “42년 전인 1973년에 이곳에 들어왔죠. 당시만 해도 연탄이 무척 귀했어요. 아기를 업고 연탄 6장을 들고 와서 너무 힘들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남자들은 새끼줄에 연탄 4장을 매달아 짊어지고 이곳까지 올라왔죠”라고 말한다. 비석마을 좁은 골목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앞장서서 안내한다. 점점 높은 곳으로…. 고양이를 따라간 곳에서 폐허가 된 교회당 건물을 만났다. 앞으로 곳곳에 산재한 비석은 모아서 추모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란다. -
- 여덟 번째 정류장 ‘보수동 책방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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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책방골목은 만디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다. 전국 최대의 헌책방 골목. 6·25전쟁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부산 중구 일대의 영주산, 보수산 자락에는 천막
학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고 이 골목은 통학하는 학생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이 귀하던 시절, 자신이 읽은 책은 팔고 필요한 헌 책을 구입할 수 있는 노점은 가난한
학생이 책을 구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었다. 이런 노점들이 하나 둘 모여 책방 골목이
만들어졌고 신학기가 되면 골목에 늘어선 책 보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목조 건물 처마 밑을 서성이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잡지를 구입할 수 있었고 고물상이 수집한 만화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곳도 바로 보수동 책방 골목이었다. 전성기는 1960~1970년대로, 당시 약 70개의 책방이 있었다. 현재는 서점이 50개로 줄었다. 2015년 터주대감인 ‘정문서점’은 36년 만에 여기를 떠났다. 하지만 차재근 문화소통단체 숨 대표는 ‘우야꼬컴파니’, 시인 이민아씨는 '민아의 책방'을 새롭게 열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전설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만디버스를 타고 달려보니 지금의 부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화장을 지운 민낯에 패인 주름을 본 느낌이랄까. 이 도시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
지도안내
지도위치 안내
번호별 장소안내
- 1부산역
- 2까꼬막
- 3이바구공작소
- 4금수현의 음악살롱
- 5닥밭골 벽화마을
- 6동아대 석당박물관
- 7감천문화마을
- 8비석마을
- 9보수동 책방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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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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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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