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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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친구가 물었다.
해운대와 광안리는 뭐가 달라? 해운대와 송정은 또 어떻게 다른데?
관심이 온통 부산의 동편 바다에 쏠려 있음을 의미한다. 부산의 해수욕장이라고 하면
으레 해운대나 광안리, 그것도 아니면 송정 정도다. 좀 더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일광까지 꼽는다.
서편의 송도해수욕장을 예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 송도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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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때 전국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영 해수욕장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송도해수욕장을 흘러간 옛 유행가처럼 생각한다.
부산의 지인에게도 물었다. 송도해수욕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물이잖아.” 좀 더 나이가 지긋한 사람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최고였지."
송도는 그랬다. 아주 나쁘거나, 아주 좋거나, 둘 중 하나의 기억에 갇혀 있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유효하다.
좋지 않은 기억은 횟집을 비롯한 생활 오폐수의 유입에서 비롯됐다. 이에 대해 관할 서구청 박기도 문화관광과장은 "옛날얘기"라고 일축했다. 지난해 부산시 보건환경연구원
조사에서는 부산 4대 해수욕장 중 송도의 수질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그는 반박했다.
송도해수욕장은 변했다. 아니 변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해수욕객이, 관광객이, 산책객이 낮밤으로 찾고 있다. 왜?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가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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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잇배, 그 시절의 아쉬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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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해수욕장은 한때 유원지로 더 유명했다. 해변이라면 어디에나 해수욕장이 다 있지만, 유원지는 사람이 모이지 않고, 자본이 결합되지 않으면 설치될 수 없는 까닭에
해수욕장보다 한 단계 더 위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송도해수욕장에는 다른 해수욕장에는 없는 '포장유선'이 띄워졌고, 여름이면 해수욕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조부모 세대가 당시의 주 향유자들인데, 포장유선은 나룻배 위에 천막을 씌워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차단한 놀잇배였다. 당시 특별히 놀 것도, 탈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남녀가 바다에서 배를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락이 되었으리라. 게다가 그 위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고 하니, 이보다 더 큰 풍류가 어디 있겠나.
서구청은 이를 재현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놀잇배는 노를 저어 움직여야 제 맛인데, 노를 저을 사람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장유선은 송도해수욕장
동편의 거북섬 주변에서 지금도 탈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그 나룻배가 아니라 성능 좋은 모터보트다. 이름만 복원된 셈이지만, 여름이면 줄을 서서 보트를 탄다.
어떤 이는 당시를 회상하고, 또 어떤 이는 보트의 속도를 즐기는 것이다.
옛 포장유선을 본 딴 모터보터는 거북섬 서편 계류장에서 탈 수 있다. 암남공원 옆 동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인데, 왕복에 15분 정도 걸린다.
1인당 1만 5천 원(성수기에는 2만 원). 송도해상 010-3563-5876.

- 신혼여행의 추억, 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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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현대식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그 역사가 생각보다 훨씬 길다. 지금도 현대식 모텔이 해수욕장 한쪽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숙박업이 여전히 성황을 이룬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새 발의 피나 다름없다. 당시 숙박시설은 대부분 ‘∼관’이란 이름을
지었는데, 청송관, 송월관, 장송관, 덕성관 등이 죄다 그랬다.
‘송도100년’에 따르면 당시 숙박시설은 단순히 숙박만을 위한 시설은 아니었다. 이른바 사교 공간과 술집, 음식점, 요정 등을 겸했는데,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그리고 숙박도 했단다. 그중 아직까지 옛 이름과 건물을 고수하고 있는 곳은 해수욕장 한가운데 위치한 덕성관 뿐이다.
모텔이 무슨 구경거리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추억의 숙박공간은 일본, 미국, 유럽에서 최근 가장 선호도가 높은 관광 포인트가 되고 있다. 다행히 덕성관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추억’을 체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물론 편의를 생각한다면 주변의 다른 모텔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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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청 건축물대장에 따르면 덕성관은 1955년 2층 목조 기와로 지어졌다. 덕성관 주인인 이안숙 씨는 "신축한 지 4년여 뒤인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으로 지붕이 다 날아가
그해 가을에 지금의 콘크리트 건물로 바꾼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시할아버지, 시아버지에 이어 3대째 덕성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이 씨는 "한때 고급 요릿집으로도 잘 알려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측근들과 함께 즐겨 찾기도 했다"며 “설령 다른 곳에서 술을
마시더라도 일부러 부하들을 보내 덕성관의 초장을 받아갔다”고 추억했다.
덕성관 051)256-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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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추억, 암남동 해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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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은 간단했다. 물기가 남은 잠수복을 하반신만 걸친 할머니 해녀는 일행 수를 대략 감안한 듯 “홍합과 성게를 두루 섞어 3만 원”이라고 부러지듯 말을 던졌다.
더 이상의 흥정은 무의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말과 함께 붉은 플라스틱 대야 속의 해산물을 이미 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에도 해녀촌이 있다. 그중 한 곳이 송도다. 정확히 말하면 암남어촌계다. 송도해수욕장 서편 끝 선착장 주변이 암남어촌계 겸 해녀촌이다. 외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산 사람들도 사실 잘 모른다. 송도에서 회를 먹는다고 해도, 어촌계나 해녀촌이 아니라 해수욕장 일대게 죽 늘어선, 요란한 간판의 횟집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회 맛을 아는 사람은 해녀촌을 겸한 암남어촌계를 찾는다. 양이 많지 않지만 그날 직접 잡은 자연산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암남어촌계에 속한 해녀는 한때 70여 명을 헤아렸으나 지금은 20명 안팎에 그치고 있다. 그중 실제로 물질을 나가는 해녀는 열 손가락에 꼽는다. 제주처럼 40∼50대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고, 거의 다 70세가 넘었다. 해녀촌이 자리 잡은 선착장 앞에는 4곳의 횟집이 있다. 해수욕장에 즐비한 횟집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중 해수욕장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 해녀들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어촌계 소관이다. 어촌계가 관리하는 횟집 중 유일하게 간판을 붙인 '부라보횟집'의 천경수 사장이 "진짜 회를 맛보고 싶지 않느냐"고 유혹했다.
못 이긴 척하고 자리를 잡으니 도다리, 달갱이(성대), 배도라치가 접시가 담겨 나왔다. 횟집에서 으레 제공하는 밑반찬은 없었다. 천 사장은 "송도 앞바다에서 직접 잡은 자연산 회인데
밑반찬이 왜 필요하냐"고 되레 볼멘소리를 했다. 졸깃한 회 한 토막이 소주 한 잔, 바다 풍경 한 폭과 함께 목구멍으로 솔솔 넘어갔다.
해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돼 있다고 한다. 부산에 이어 인천과 원산항을 잇따라 개항하는 1876년 강화도 불평등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들이 제주 어장에도 눈독을
들였고, 결국 산소통을 이용해 제주 바다 밑을 싹쓸이했다. 잠수 호흡만 하는 제주 해녀들은 일본 어민을 피해 뭍으로 나왔는데, 이들은 ‘출가 해녀’라고 불렀다. 부산 송도와 영도
해녀들이 바로 그 출가 해녀들의 후손들이다.
소주와 회, 풍경에 빠져 있는데, 해녀 한 분이 툭 내던졌다. “물에께 하러 가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 물었다.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해녀 할머니가 “바다로 물질하러 가자”는 말이라고
통역(?)했다. 신선하면서도 비릿한 바다 향이 목구멍 바닥까지
암남어촌계 해녀촌 051)231-0959
송도는?
송도! 이름이 참 예쁘다.
한자로는 '松島'다. 소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송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송도해수욕장 동편에
송림공원이 있다. 하지만 섬이 아닌데, 왜 섬(島)이라는 글자를 넣었을까?
서구청이 발간한 '송도 100년'에는 다른 주장이 담겨 있다. 송도는 일본 3대 명승 중 하나인 마쓰시마(まつしま[松島])의 우리식 한자어라는 것이다. 송도해수욕장을
개발한 송도유원주식회사도 마쓰시마에서 유래했는데, 부산 송도뿐 아니라 인천 송도, 포항 송도도 같은 맥락에서 명명됐다고 했다. 명확히 고증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 슬픈 송도다.
송도는 1913년 공영 해수욕장이 됐다. 처음은 아니다. 앞서 부산에는 남빈해수욕장이 있었다. 지금의 자갈치 자리다. 자갈치가 매립되면서 송도가 그 대안이 된 것이다.
송도는 해운대가 온천을 겸한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국내 최고의 해수욕장이었다. 그러나 생활 오폐수를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 더 이상 피서를 즐길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그때가 10여 년 전이다.
송도는 거듭나고 있다. 그 거듭남은 주로 추억의 재구성에 있다. 다이빙대, 뱃놀이, 구름다리 등은 그런 재구성의 정점에 서 있다. 재구성은 복원과는 다르다. 시대에 맞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추억은 그래서 과거로 돌아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를 끌어와 새로운 미래를 여는 마법의 열쇠다. 송도는 그런 작업대
위에 올려졌다. 송도에서 가장 오래된 숙박시설인 '덕성관'에 주목하는 것도, 주말 저녁이면 소리 없이 나타나 피서객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당고할매'를 들먹이는 이유도,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진 '총각집'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모두 추억의 재구성 때문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해녀들, 두도 대신 대가리섬으로 부르는 어민들의 억센 말투도 기억하려는 이유까지 다 여기에 있다.
송도만큼 많은 태풍을 맞은 해수욕장도 없다. '사라호'부터 '셀마' '매미'까지 모두 큰 상처를 남기고 간 태풍을 기억하는 태풍 박물관을 송도에 세우자는 주장도 그래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추억은 재구성을 원한다. 그러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방점이 중요하다. 이는 비단 송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